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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旺茂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 제48호
발행연도
2015.7
수록면
133 - 158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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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십자각과 宮牆들은 고종대 대원군의 왕권강화 차원에서 경복궁 중건이 이루어질 때 재건되었다. 조선전기에도 십자각은 존재했지만, 임진왜란시 왜군이 한양을 약탈하면서 경복궁이 파괴될 때 같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대 대원군이 심혈을 기울여 중건한 경복궁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왕조의 무궁함을 이어가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다. 경복궁의 전각 배치가 조선전기의 형태와 청나라 자금성의 형태를 모델로 하여 지어진 것에서도 대원군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정치적 구상에서 만들어진 경복궁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 속에서 그 자리를 점점 잃어버리게 된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경운궁이 제국의 正宮이 되면서도 경복궁은 정궁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이후 일본에 합병된 이후로는 경복궁의 훼철과 매각이 자유로워졌다. 공식적으로는 1911년 李王職에서 순종의 명의로 조선총독부에 경복궁 부지의 권리를 넘기면서 경복궁 전각의 운명이 일제의 의사에 따라 좌우되었다.
경복궁이 본격적으로 해체되는 것은 일제시대부터였다. 1915년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191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 1918년 창덕궁 소실에 따른 전각의 이전, 1923년 전차선의 개설, 1929년 조선박람회를 위한 궁장 훼철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에 경복궁 좌우의 십자각들이 궁장과 분리되거나 사라진 것은 일제시대 총독부가 계획적으로 정치?사회적인 행사를 경복궁내에서 개최한 결과이다. 1914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면서 흥례문 구역이 모두 훼철되었고,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규모의 박람회가 개최되며 궁궐의 전각과 궁장 및 십자각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훼철되는 양상이 발생하였다.
서십자각이 1923년 9월에 광화문에서 영추문으로 연결되는 전차노선을 연결하면서 훼철되었다. 총독부 정문에서 좌우로 나뉘어 좌측은 서십자각 터를 지나 총독부 담장과 나란히 달리며 효자동 방향으로 가고 있고, 우측은 동십자각 외곽을 지나 안국동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따라서 전차노선만을 보아도 서십자각의 위치가 그 노선에 포함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서십자각이 사라진 배경이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공진회 개최 이후 자경전이 박물관사무실 용도로 활용되면서 경복궁에서 진행된 각종 공사의 결과 훼손되거나 분리된 기물들이 사무실에 보관내지는 임시로 두었다고 생각된다. 경복궁 영추문으로 전차선이 가설될 때 서십자각이 훼손되면서 그곳의 서수가 이동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배경이 아니라면 자경전 서수의 존재는 조선왕조 궁궐의 역사에서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동십자각 서수는 어디로 갔는지 의문이 든다. 『조선고적도보』 권10에 실린 동십자각의 원형은 오늘날 자경전의 서수와 상이하다. 서십자각이 완전히 파괴되어 사라졌음에도 그 부속물인 서수가 존재하는데, 십자각의 외관을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는 동십자각은 서수의 향방을 전혀 알 수 없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개항기 경복궁의 변화
3. 宮墻의 변화와 십자각 훼철
4. 박람회와 자경전 瑞獸의 등장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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