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42호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67 - 87 (21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조선전기는 왜구의 잦은 침탈로 인해 일본과의 외교적 해결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다. 그러나 막부의 왜구 통제력 부족으로 교섭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그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자 명쾌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조선은 信義를 잃은 일본에 대하여 夷狄으로 대하거나 小國으로 여기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대일 관계는 문인들에 의해 시문으로 구현되었다. 하지만 시문을 살펴보면, 현안인 왜구를 근절하는 데에만 집중한 나머지 조일 간의 다양한 교류의 면모는 찾을 수 없고 왜구 금압이라는 한 측면에만 경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왜구 문제가 조일 간의 정상적인 문화 교류를 저해하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고 문학사에서도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왜구의 창궐이 심할수록 교화의 당위성은 제고되었으나 직접 왜구를 대면하여 교화할 길이 없었던 당대 문인들은 일본국왕사나 통신사에게 주는 시문으로나마 교화의 뜻을 일본에 전하고자 하였다. 그 대상이 왜구여야 함에도 실체가 모호하였기에 일본국왕을 상대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조일 양국의 교류에 대한 연구가 유형적인 것에 편향되었다는 반성에서, 조선전기 시문에 나타난 대일 교화의 양상과 그 기저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었다. 교화의 양상으로는 먼저 조선이 교화의 주체로 나서고자 箕子와 찬란한 문물로써 태평시대임을 부각시키려 한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조선의 정치가 안정되고 문화가 난숙하였던 기반 위에서 나왔으며 그 동인은 ‘恕’와 ‘位育’이라는 유가의 치도였다. 우수한 문물로 인한 문화적 우월감과 유가의 불가에 대한 우위는 ‘兩國一家’라는 교화의 기치로 이어진다. 교화라는 말이 관념적이라서 양국일가에 장애가 되는 험난한 동해를 교화로 고요히 하려는 관념성을 띠었고, 더 나아가 교화를 ‘雲雨’나 ‘雨露’로써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화의 양상을 보인 기저에는 ‘仁’과 ‘圓’이 있었다. 교화의 기저 가운데 ‘仁’은 무력보다는 덕을 높이고 따스한 햇볕과 같이 만물을 비추어 소생시키는 지향을 지녔다. 우주론적 인식에 근거하면 일본은 ‘仁’의 방향이 되는데, 그 점은 실제 왜구가 벌인 만행과는 모순되지만 왜구를 금제할 이론적 근거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인’을 감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圓’은 만물의 운행 원리로, 조일 간의 교린에도 적용되기를 바랐다. ‘圓’의 실제적 의미는 교린에서의 信義를 뜻하였지만, 교화의 기저 가운데 하나로서 교화가 단절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기능이었다. ‘仁’과 ‘圓’의 층위가 달라 구분이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仁’이 일본의 人性을 계발하는 교화의 핵심적 기저라면 ‘圓’은 그것을 보조하는 주변적 기저라고 할 수 있겠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9)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