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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심경호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열상고전연구 제71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24 - 170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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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洛西) 장만(張晩, 1566-1629, 시호는 忠定)의 문집은 7권 3책의 운각인서체자 활자본으로 전한다. 별세한 지 1백 2년이 되도록 유문(遺文)이 세상에 간행되지 못하다가, 낙서의 족현손 장보현(張普顯, 1658-1739)이 유문들을 수집하고 여러 사람들의 찬술(贊述)을 붙여서 판각하여 인쇄할 것을 서둘렀다. 장보현은 낙서의 증손 장세광(張世光)과 함께 이의현(李宜顯)에게 서문을 했다. 이의현은 인조반정의 계책이 실로 ‘실로 공의 문미(門楣)에서 나왔다’라고 했다. 이것은 사위인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1586-1647)의 계책에 낙서가 동조했음을 언급하고자 한 듯하다. 사실, 낙서는 반정 자체에 선뜻 응하지 않았으므로, 최명길은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서찰을 보냈다. 이의현은 낙서가 후금이 대두하는 전환기에 약소국으로서 불가피하게 ‘기미(羈?)하자는 설’을 주장했다는 점을 일정하게 평가했다. 그런데 낙서의 이 주장은 바로 최명길이 주장한 외교정책이다. 최명길은 후금과 맞서 싸우지 말고 회유하자는 논의를 ‘기미의 설’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의현은 낙서의 시문에 대해, 낙서가 종묘사직을 위해 헌신했으므로 결코 시문을 아름답게 꾸미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낙서는 시문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결코 없었지만 시문에 뛰어났다. 낙서는 1589년(선조 22) 생원ㆍ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하고 1591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상층 문인이었다. 그런데 낙서는 특히 사위 최명길과 수창(酬唱)을 많이 하여, 그것이 『낙서집』과 최명길의 문집 잔권(殘卷)에 전한다. 본고는 낙서의 정식시(과시)를 통해서 낙서의 작시 수준을 살펴본 후, 낙서와 지천의 수창, 그리고 지천이 낙서에게 올린 서찰을 통해서 낙서의 시 세계, 행동양식과 사유방식 등의 일단을 살펴보았다. 최명길은 만년에 인조의 총애를 잃고 청론의 비판을 받으면서 쓸쓸하게 타계했다. 하지만 낙서의 손자 장현주(張顯周)는 최명길의 유사(遺事)를 지었고, 또 유집에 「지천선생최문충공유집서(遲川先生崔文忠公遺集序)」를 지었다. 낙서의 손자 장현주만이 최명길의 사유양식을 이해해 준 것은, 최명길이 생전의 낙서의 행동과 사유를 이해해준 것에 대한 가장 적절한 보답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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