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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영재 (가온문화재연구원)
저널정보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석당논총 제78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79 - 206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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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국(伊西國)은 대체로 신라에 의해 늦게 복속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삼국사기』에 늦은 시기에 병합되었음이 보인다는 데에서 이른 시기에 복속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삼국유사』 제삼노례왕조의 건무(建武)18년이라는 기년과 『삼국사기』에 다른 주변소국과는 달리 유독 이서국만 ‘이서고국(伊西古國)’이라고 표현한 점 등에 주목해 본다면 신라가 이서국을 가장 먼저 복속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는 이서국을 복속한 이후에 재지세력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었는데, 서서히 지배의 강도를 높이게 됨에 따라 재지세력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결국 반란이 일어났고 신라의 심장부가 전장(戰場)이 되었다. 반란은 구원군이 도착하여 전세(戰勢)를 뒤집으면서 마무리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신라는 가혹한 조처를 단행하여 재지세력을 절멸(絶滅)시켰고, 그것은 이서국이 위치한 청도에 고총고분이 단 1기도 조성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신라는 주변소국에 비해 국력이 다소 열세였고 교통로의 거점이었던 이서국을 복속의 첫 번째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이서국을 복속한 지 수십 년이 지나 갑자기 압독국(押督國)이 항복해오는 사건이 발발하였다. 이서국을 복속한 신라와 접경(接境)하게 되면서 압박을 느낀 압독국 지배층이 국권을 넘겨주는 대신에 재지기반을 온존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파사이사금은 2개월 간 압독으로 친행(親幸)하였다. 왕의 친행인 만큼 교통로의 안전은 필수적이었고, 신라가 이서국으로 진출하여 개설한 교통로, 즉 이서로(伊西路)의 운용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즉 이서국 복속은 영역확장을 넘어 서방으로의 대외진출을 위한 항구적 안전 확보를 가능케 한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고 짐작된다. 이서로의 운용이 갖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서로는 신라가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개설·운용한 첫 번째 교통로였다고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파사이사금의 친행은 피복속지역에 대한 최초의 사례에 해당한다. 광개토왕 및 진흥왕의 행보와 파사이사금의 친행을 동일시 할 수는 없겠으나 모두 당시 각국의 최전방에 몸소 나아갔다는 데에서 강역 획정과 관련된 순수(巡狩)로 볼 수 있다. 진휼로 표현되었으나 순수가 내포되어 있었기에 압독국 지배층은 재지기반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결국 수십 년이 지나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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