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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석원 (수원교회사연구소)
저널정보
수원교회사연구소 교회사학 교회사학 제17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55 - 209 (5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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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남긴 서한들은 선교사제의 시각에서 1839년(기해) 교옥(敎獄)의 원인, 경과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작성한 ‘박해 보고서’는 1839년 교옥 당시의 생생한 현장을 전해주고 있다. 1830년대 후반 선교사제의 노력과 신자들의 열성에 의해 조선천주교의 교세는 확장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신자들 사이에 배교자들도 존재했고 포졸들의 약탈과 체포가 이어졌다. 기근이 들었던 1838년에는 신자 체포 사건들이 서울 인근과 지방에서 연이어 나타났는데, 선교사제 사이에는 안동 김씨가 주도하는 조선 정부가 박해를 확산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와 대규모 박해가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이 교차하고 있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1838년과 1839년 초에 산발적으로 발생했던 신자 체포 사건이 1839년 4월 7일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천주교 교옥으로 비화되었다. 서양인 선교사제의 존재가 탄로나고 척사여론이 거세지면서 천주교에 적대적인 풍양 조씨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4월 18일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반포되고 공식적인 옥사로 전환되었다. 조선 정부는 처형보다는 배교를 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고문과 회유 방법을 동원했다. ‘유다스’라 불리는 일부 배교자들은 다른 신자들이나 선교사제의 체포에 앞장섰다. 박해가 치열할수록 신앙을 지킨 순교자가 늘어났고 그와 함께 배교자도 늘어났다. 피신 중이던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선교사제들이 나서야 한다는 일부 신자들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자신은 순교하는 대신 다른 동료 사제들을 해외로 탈출시키려 했다. 그러나 모방·샤스탕 신부는 그 계획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계속 조선에 남기로 했다. 더 이상 피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앵베르 주교는 스스로 나가 붙잡혔고, 박해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선교사제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주교의 지시에 순종한 모방·샤스탕 신부는 스스로 나가 잡혔고, 결국 세 선교사제의 순교를 계기로 1839년의 교옥은 가라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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