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15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6 - 27 (2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논문은 고려 명종대 지식인들이 “시와 그림은 본래 한 가지(詩畵本一律)”라는북송 소식(蘇軾)의 문예론 및 이러한 시와 그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는 송적(宋迪)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수용한 문화사적 의미를 조명한 것이다. 1170년 무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실권 없이 지내던 명종(明宗, 재위1170-1197)은 재위 15년인 1185년에 여러 문신에게 명하여 송적의 〈소상팔경도〉 에 대한 시를 짓게 한 후, 화가 이광필(李光弼)에게 명하여 〈소상팔경도〉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때 문신들 중에서 이인로와 진화가 지은 시문이 절창(絶唱)으로뽑혔다. 그런데 1185년은 명종이 지목한 이의민(李義旼)이 집권 무신이 되면서이전 무신정권기와 다르게 명종의 통치력이 상당 부분 회복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이때 명종의 어명에 의해 소상팔경도 제화시문에 참여하였던 이인로와 진화를 위시한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소식의 ‘시화일률론’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직업 화가들이 주로 담당하던 ‘그림’의 제작을 고려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최고의 사회문화적 소양이라고 자부심을 가졌던 ‘시’의 창작과 동일한 가치로평가한 점이다. 이들에게 시란 표현이 통제되던 무신정권기에 우회적으로 자신들의 뜻을 드러낼 수 있는 문화적 수단이었다. 따라서 북송 문예론과 소상팔경도의수용은 선행 연구들이 언급한 것처럼 단지 소식에 대한 숭배열 속에서 행해진 일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소식의 저항적이고 참신한 문학 정신을 배우고자 하였던것이다. 소식과 그의 벗들이 공유하였던 ‘시화일률론’의 진정한 의미는 그림도 시처럼 암시적으로 그들의 불만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당시 정책을 주도한 왕안석(王安石) 일파의 개혁 세력과 차별화되는 문예론의 표명으로서, 기존에 확립된 시의 기능, 메타포, 관습 등을 그림에 대입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인로나 진화와 같은 당대 지식인들이 소식의 문예론에 깊이 공감한 데는 당시에 변화하던 고려 왕실의 위상과 국제적 질서 속에서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 고려에서 가능하다고 본 시대정신에 기인한 측면이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 논문은 1185년소상팔경 시와 그림의 제작이 이렇게 명종이 회복되던 자신의 통치권을 바탕으로문치(文治)를 통한 고려 문화의 재부흥을 꿈꾸던 시점의 산물이었을 가능성을 추론하였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