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경태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108輯
발행연도
2023.10
수록면
183 - 227 (45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임진왜란은 강화교섭을 기점으로 두 시기로 나뉜다. 이 글에서는 강화교섭기에서 정유재란 시기 조선이 명에 보낸 사행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전쟁의 양상이 사행에 미친 영향을 살피고, 사행이 이후 조선과 명의 외교 관계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추적하고자 했다.
이 시기 조선의 사행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강화교섭 시기의 사행은 조선의 세자 책봉을 요청하거나, 명의 일본 책봉사(冊封使)와 함께 조선의 사절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한 명분을 확보한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교섭이 결렬되고 전쟁 위기가 높아지자, 조선은 명에 이를 급히 전하며 다시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명은 지원을 결정하였으나 한편으로 조선의 대비 현황을 비판하며 조선을 제어하려 했다. 조선은 명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이를 거절하기 위한 사절을 보냈다. 전쟁 재개 후, 조선은 명에 감사와 사죄를 함께 표하는 사절을 보냈다. 전쟁 중 명군 지휘관이 탄핵을 당하자 조선은 그를 구원하기 위한 사행을 보냈다. 이를 빌미로 모함을 당하기에 이르자, 조선은 자국을 변호하기 위한 사행을 여러 차례 보냈다.
정유재란을 거치며 사행이 가진 임무는 다양해졌다. 군사 요청이라든지 명군이 주도하는 강화교섭 반대라는 비교적 단순하고 직접적인 목표를 넘어,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행이 구성되었다. 사행이 북경에서 명의 관청이나 관원에게 직접 문서를 전하는 일도 빈번해졌다. 조선과 명의 관계에서 조선 사행의 형태에는 일련의 변화가 생겨났다.

목차

국문 초록
Ⅰ. 머리말
Ⅱ. 강화교섭 기간의 사행
Ⅲ. 전쟁 위기와 군사 요청
Ⅳ. 전쟁 재개 후의 사행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151-24-02-088244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