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권용철 (경기대학교)
저널정보
연세사학연구회 학림 학림 제53권
발행연도
2024.3
수록면
239 - 269 (31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거란의 1차 고려 침입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도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거란제국은 건국 이후 사방으로 세력을 팽창하면서 발해를 멸망시켰고, 후진으로부터 이른바 ‘연운 16주’를 할양받아 장성 이남의 영토도 확보했다. 하지만 거란제국의 내부 정치는 계속된 계승분쟁으로 인해 안정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거란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가는 임무를 맡은 예지황후-승천태후는 남편 경종황제, 아들 성종 황제의 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제국을 점점 안정시키면서 동아시아의 정세를 주도할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거란이 북송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전연의 맹약’을 맺기 이전에 거란으로서는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바로 고려와의 관계 설정이었다. 고려는 거란의 동쪽에 위치한 ‘유일한’ 독자적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란은 이후 북송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고려와 북송의 관계를 끊고, 직접 고려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한 방법이 군사적 침입이었는데, 고려가 서희를 보내 회담을 하면서 거란과의 관계 설정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거란 역시 비교적 순조롭게 전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고려와 북송이 군사적 지원을 둘러싸고 서로 간에 뜻이 맞지 않아 공식적 관계가 단절되면서 거란 중심의 국제질서 형성은 예상보다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거란의 1차 고려 침입을 분석할 때에는 동아시아 전체의 구도를 염두에 둔 관점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승천태후가 장기간에 걸쳐 만들고자 했던 국제질서는 ‘전연의 맹약’을 통해 북송과의 관계 설정이 이루어지면서 그 모습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 구도가 아무런 우여곡절을 거치지 않고 계속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승천태후가 사망한 이후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고려는 계속 거란에 저항하면서 결국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까지 거두었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과의 조공-책봉 관계까지 단절할 수는 없었다. 11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더욱 거란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당 제국의 멸망 이후 11세기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기까지의 과정에서 거란의 1차 고려 침입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바로 거란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수립의 큰 발판이 되었다는 점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