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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복현 (경희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84호
발행연도
2022.11
수록면
187 - 216 (30page)
DOI
http://dx.doi.org/10.18347/hufshis.2022.84.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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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와 거란은 李繼遷과 義成公主가 결혼해서 두 나라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했다. 따라서 두 번째로 李元昊와 興平公主도 결혼했다. 이원호는 비록 서하를 건국한 뛰어난 군주였으나 반인륜적인 폭군의 일면도 있었다. 이원호는 거란의 興平公主를 부인으로 삼았다. 그녀는 결혼하고 7년 만에 질병으로 사망하였는데 거란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찾아가지도 않았다. 후에 거란의 사신이 공주가 사망한 원인을 물을 때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서 거란의 황제가 분노했다. 서하에서는 거란의 고압적인 태도와 경제적인 문제로 불만이었다. 거란은 이원호의 거만한 태도와 興平公主의 죽음과 黨項族의 歸屬문제로 분노해서 전쟁을 일으켰다. 1044년에 遼 興宗이 176,000명의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거란이 승리했지만 李元昊가 후퇴하면서 말의 먹이를 없애고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는 전술을 사용하여 승리했다. 1049년에 이원호가 죽고 한 살의 의종이 황제가 되자 遼 興宗은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서하가 항복하고 거란이 승리했지만 두 나라 사이는 이전만큼 좋지 않았고, 서하가 다시 구혼했을 때 거란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를 통해 李元昊와 興平公主의 결혼이 양국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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