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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저널정보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족문화 한국민족문화 제60호
발행연도
2016.8
수록면
145 - 180 (36page)
DOI
10.15299/jk.2016.8.6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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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信使는 일본의 江戶에 파견되었다. 이런 전례를 무시하고서 대마도는 처음에는 연기를 요청하였다가, 수년 뒤 1791년에는 어려운 재정사정을 들어 對馬島까지의 내왕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연기는 가능해도 대마도까지는 불가능하다고 맞섰다. 그러던 1795년에 이조판서 尹蓍東과 동래부사 尹長烈의 라인에 있는 역관 朴俊漢이 왜관의 오다[小田]나 도다[戶田] 등과 비밀 교섭에 들어갔다. 이때의 합의사항은 선물•선박•인원수를 줄이고, 회담장소를 대마도로 하는 것이었으니, 4년 만에 조선 조정에 변화의 기미가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대마도까지의 행차는 그간의 관례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정조를 포함한 많은 조정 대신들의 의견이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던 박준한은 1798년에 대마도 측과 1807년에 파견하자는 약속을 받고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준비를 위해 규정을 제정하는 역관을 동래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4년 이상 동안 아무런 진척도 못내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805년에 조사에 착수하였다. 역관들이 대마도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서계를 위조하였다고 드러났다. 서계를 두 개 작성하여 한 개는 정부에 제출된 것인데 에도까지 간다고 적혀 있고, 다른 한 개는 대마도에 준 것인데 대마도까지 간다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정책라인에 있던 사람들은 빠지고 실무 관련자들만이 사형과 유배형에 처해지고 받은 돈은 추징을 당하였다. 이후 조일외교는 정상으로 가동되어 마침내 1811년에 통신사가 파견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규정은 앞서 희생당한 역관들이 만든 것과 대부분 같았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통신사, 延聘에서 易地로
3. 역관의 通信使節目 강정
4. 동래부에 按覈使 파견 - 서계위조·뇌물수수
5. 형벌, 추징, 그리고 辛未通信으로
6.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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