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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敏弘 (성균관대학교)
저널정보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제73호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7 - 34 (28page)
DOI
10.17293/dbkcls.2017..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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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號와 廟號는 중세왕조에 있어서 국가의 존엄과 주체성이 내재된 중대한 표상이었다. 연호는 중세의 경우 제후국은 이를 시행할 수 없고, 중원의 소위 황제국 들이 반포한 ‘正朔’에 기준하여 그들 나라의 紀年(연호)을 사용해야 했으며, 이를 어기면 강력한 제제가 따랐다. 그리하여 우리 역대 왕조는 장구한 기간 동안 중국의 연호를 써왔다. 廟號 역시 삼국시대 천여 년 동안, 고구려의 ‘太祖大王’과 신라의 ‘太宗武烈王’ 밖에 없고, 나머지는 제왕들 모두 ㅇㅇ왕으로 칭했다. 고려 조선조 천여 년 동안 우리는 自體紀年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중원 왕조들의 연호를 써왔다. 조선조 말엽 대한제국으로 再造된 후, 광무황제에 의해 연호 ‘光武’가 建元되고, 융희황제가 禪讓을 받아 즉위하여 ‘隆熙’로 개원했다. 명실상부한 稱帝建元이 실시되었지만, 외세가 작용했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있긴 하나, 민족자존과 긍지를 실천한 千載一遇의 기회를 후인들은 살리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천여 년 간 사용해왔던 중원왕조의 연호를 버리고, 일본왕의 연호를 별 저항 없이 30여 년 간 사용하면서, 그것이 갖는 치욕도 인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우리는 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해방 후 民族年號인 ‘단기’를 의연하게 사용하다가, 졸지에 별다를 고민도 없이 파기하고, 서양 연호인 ‘西紀’를 근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사용했고, 지금도 당연한 것처럼 국가 공식문서에까지도 쓰고 있다. 산야의 편만한 墓碣銘에 수 세기동안 중국연호로 도배되었다가, 지금은 西洋年號인 서기가 범람하고 있다. 통시적으로 계속된 이 같은 암묵적 新舊 事大主義的 行態가, 便宜와 慣行에 편승하여 소위 진보라는 탈을 쓴 채, 자주성을 버린 이 같은 현상이 당연시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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